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http://blog.naver.com/kc0377/120000342847 1970년대 초 어느 늦가을 오후. 미당(未堂)은 선운사(禪雲寺) 고랑을 지난다.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이다. 선운사 버스 정류장에 우산도 없이 홀로 서서 이슬비를 맞는다. 때마침 선운사 동구 너머 주막집이 눈에 든다. 뜨끈한 방에 들어앉아 익어 쉰 김치접시 앞에 두고 막걸리를 퍼마신다.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은 육자배기 한 소절 청하는 나그네의 고집에 못 이겨 나직이 소리를 한다. 이듬해 미당은 이곳을 다시 찾았다. 주막은 간데 없고 막걸리 집 여자도 사라졌다. “술 팔고 창도 곧잘 하던 그 여자는 말년에 스산한 신세를 아편에 의탁하다가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고 마을사람들이 전할 뿐. 미당은 읊었다. 그리움에 목말라 서럽게. (불교신문중에서)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禪雲寺 洞口, 徐廷柱) 선운사를 다녀올 생각에 9월 말부터 미당 시집을 다시 읽고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꽃이 하도 슬퍼서 나를 두고 가려는 님도 못 떠날 것' 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에 고창 선운사를 찾았다 동백이 필 때도, 단풍이 흐드러질 때도 아닌 이 때 선운사를 찾은 것은 어쩌면 '막걸리 집 여자' 가 투영되고, '목 쉰 여자'가 스며들어 시든 채 붙어 있는 작년의 동백꽃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 시간 여 동안 차를 달려 처음 도착한 곳이 고창읍성(高敞邑城). 사적 제145호로 둘레 1,684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며, 서해연안에 출몰하던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했으며, 우리나라 3대 읍성 중에 가장 아름답게 원형이 보존된 고창읍성에 들어서니 마치 백제의 한 고을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창읍성은 3개의 옹성과 6개의 치성이 있는데, 당일 여행이라는 무리한 일정 탓에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동문과 읍성의 정상부근에 위치한 대나무 숲(맹종죽, 孟宗竹)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게르마늄온천인 '석정온천' 을 뒤로하고 고창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인 지석묘 군(支石墓 群, 고인돌 군)으로 향했다 고창의 지석묘는 고창읍 죽림리 일대 매산 마을을 중심으로 447기가 남아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세계최대의 지석묘 군이다 크게 6개의 코스로 구분된 지석묘 군은 3번째 코스에서 산허리에 흩뿌려진 듯 산재한 지석묘 군을 보며 감탄의 절정에 이른다 오후 2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우선 배를 채울 욕심에 풍천(風川)삼거리로 향했다 선운사로 들어서는 초입에 위치한 풍천삼거리는 옛날의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 대신 장어집 간판이 즐비하다. 절집에 들기 전의 육식이라 민망한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복분자(覆盆子)술, 작설차(雀舌茶)와 더불어 고창의 3대 먹거리의 하나인 풍천장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풍천장어정식을 주문했다 "風川" 이란 말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과 바다와 만나는 지점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선운사 입구에서 줄포만으로 흘러드는 장수강도 풍천이라 여기서 나는 장어를 '풍천장어' 라고 한다 통통하고 단백질이 많기로 소문난 풍천장어를 쌈과 깻잎에 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거기에 복분자술로 반주를 한다면 부러울 것 없는 식사가 되었을 것이다 복분자(覆盆子)술은 부녀자들이 깊은 산중에서 자생한 복분자 열매(산딸기 열매)를 7~8월께 채취하여 만드는 술로서 복분자 열매를 따고 술을 빚는 작업을 할 때는 금남의 구역으로 통제된 상태에서 부녀자들만의 정성으로 만들어 음양의 이치에 따라 남정네들에게 보양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복분(覆盆)이라는 이름도 이 술을 마시고 소변을 보면 요강이 뒤집어진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오후 3시가 넘어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 입구엔 한때 미당이 머물며 원고를 썼다는 '동백장 여관' 은 간 곳 없고 현대식 옷을 입은 호텔들이 서 있다 계곡을 따라 걷다보면 길가 오른편에 미당이 육필로 쓴 "선운사 동구"를 만나고 다시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부도밭이 나타난다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유명한 백파스님 부도비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가 사천왕문을 들어섰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며, 도솔산(兜率山) 이라고도 불리는 선운산에 자리잡은 선운사는 577년에 검단대사가 창건하여 그 후 수 차례의 중건과 소실을 거듭하다 광해군 5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20여명의 승려가 있는 초라한 사찰이지만 선운사는 한때 주위에 89개 암자를 거느리고 3천여 승려가 수도했던 거찰이었다 사천왕문을 나서자 보이는 것은 만세루(萬歲樓)다. 배흘림 기둥과 700년이 된 두 개의 아름드리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끼게 한다. 만세루와 마주한 대웅전은 평일이었으나 입시 철 때문인지 사람들로 붐볐다 대웅전 뒤에 보이는 것이 동백나무숲. 약 3,000 여 그루가 자생하는 이 동백나무숲은 4월이 되면 핏빛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연출한다. 피어서 고운 동백은 질 때도 송이 째 뚝뚝 떨어져 슬픔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게 한다. 수령은 약 5백년. 천연기념물 1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운사 경내를 기웃거리다가 전통다원에 들러 작설차(雀舌茶)를 주문했다 작설차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연차의 일종이다. 작설차라고 이름한 것은 차나무의 어린잎이 참새(雀) 혀(舌) 끝만큼 자랐을 때 채취하여 만드는데서 연유하였다 선운사 명물 가운데 제 1 위에 작설차를 꼽는다던데 다기(茶器)에 놓인 차 향과 맛이 깊어 세 잔이나 비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빡빡한 일정 탓에 '도솔천으로 올라가는 길 같다' 고 하는 도솔암(兜率庵)이나 마애불(磨崖佛)을 보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내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래도 돌아서 오는 길에 선운산가(禪雲山歌) 나 질마재신화의 어느 구절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내 사고의 한 귀퉁이는 한동안 고창에 머무를 것 같다 늦은 밤 서울로 향하는 나는 단풍이 절정인 11월의 선운사를 걷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2003. 10. 29   태그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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